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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번 명화 × 함께쓰는 밤

함께쓰는 밤 전시장/쓰밤4 (2020)

by LucWriter 2021. 5. 24.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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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Picture of Dorian GrayDate, Ivan Albright

 

 

 


 

 

 

첫문장n최현수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온갖 악취가 콧속을 찔렀지만 이곳에서 냄새 따위를 신경 쓰는 건 나뿐인 듯했다. 박사는 당장이라도 나를 실험대로 끌고 갈 듯한 기세였지만, 나또한 만만하게 보일 수만은 없어서 컹컹 짖어댔다. 그러자 박사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자네, 인간이길 포기한 지는 얼마나 되었나?”

 

나는 그에게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고 되물었다. 난 인간이 아니라 개입니다.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그러자 박사는 웃음을 터뜨렸다. 난 그제서야 박사가 왜 폭발물이라고 불리는 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언제든 자신이 가진 모든 감정을 극한까지 터뜨릴 준비가 되어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상당한 권위가 있는 사람이 아니면 좀처럼 할 수 없는 그런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체 하고 있으면 좀 편하던가?”

 

그러면서 그는 내가 무언가에 굴복한 패배자라도 된다는 듯 경멸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는데, 묘하게도 뒤에 앉아 있던 검은 고양이도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난 그들에게 뭔가를 해명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악취가 계속해서 코를 찔렀고, 나는 그게 온갖 생물들의 피 냄새가 뒤범벅 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이 이곳에서 얼마만큼의 생명체를 학살해왔을지 짐작이 갔다.

 

“날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내 말투에는 두려움이 배어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내 감정을 알아챈 박사가 즐거움을 느꼈을지, 아니면 가증스러움을 느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는 피가 얼룩진 손으로 나를 쓰다듬었다. 포악한 강자의 동정을 받는다는 건 이런 느낌일까. 이런 식으로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래서 내 피 냄새가 이곳 악취에 섞여 들어가지 않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봐야 하는 것일까?

 

“가치를 증명해 봐. 그럼 먹여주고 재워주지. 하지만 인간성까지 되돌려 줄 순 없어. 그건 다른 문제니까.”

 

“증명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박사는 표정으로, 내가 그 질문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을 넌지시 말하는 듯했다.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걸 나한테서 확인하려고 하지 말게. 개가 되기로 했으면 얌전히 개처럼 굴어. 아니면 아직 미련이 남았나?”

 

그 말을 들은 나는 묘하게도 차분해졌다. 애초에 내게는 내가 인간이었다는 자각 자체가 없었다. 아니, 그게 무슨 헛소리인가? 내가 인간이었다니? 나는 박사와 그 뒤를 따르는 고양이를 먹먹한 마음으로 지켜보다가, 그들을 따라 나서기 위해 조금씩 발을 움직였다. 되도록 피를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한 발자국씩. 그러자 멀리서 고양이와 박사의 대화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박사님, 뇌 이식이 실패했던 걸까요?”

 

“실패? 그랬다면 저 치는 이미 3년 전에 죽었겠지. 제 발로 다시 이곳을 찾을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몽환적인 #엉망진창 #경멸 #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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