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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번 사진 × 함께쓰는 밤

함께쓰는 밤 전시장/쓰밤4 (2020)

by LucWriter 2021. 5. 23.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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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번 사진

 

 

 


 

 

 

은비n장은비

 

새벽녘 꿈을 꾸었어

 

꿈을 꾸었다. 오래전 만나오던 그가 자주 꿈에 나왔다. 우린 이미 이별한 지 꽤나 오래되었는데, 다시 만나고 싶은 소망이라도 반영이 된 건지 꿈속에서 당신은 내게 아는 척을 해왔다. 파란 슈트를 말끔히 빼입은 너는, 체격도 좋고 표정도 좋았다. 누가 보아도 참 예쁘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던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다만, 약간 거만해진 표정으로 나를 보며 인사하는 너란 사람을 나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오만가지 감정들이 교차했다. 너는, 좋아한다는 말도 보고 싶었다는 말도 아닌, 잘 지냈냐고 했다. 나는, 잘 지냈냐는 그 말 한마디에 다잡아두었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헤어진 이후로 줄 곳 그토록 미워하고, 그토록 애절했던 너였다. 울다 지쳐 잠들게 한 것도 너였고, 화를 낼 대상이 사라져 엉뚱한 사람에게 화내게 한 것도 너였다. 존재는 없는데, 나의 이 분노와 슬픔과 애통함과 치밀어 오르는 억울함을 달랠 길이 없도록 만든 게 너였다. 그러니, 다시 보게 되면 할 말이 많을 거라 생각했다. 원망하고 분노하리라 생각해왔었다. 그러나 오늘의 나는 "잘 지냈냐"라는 너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멍하니 너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좋아해.'

라고 말했다. 겨우 너를 보고 한다는 이야기가 그거였다. 5년 넘게 보지 못했던 사람에게 처음으로 건네는 말이 좋아한다는 말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멍청하기 그지없다. 사랑이었다고 말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저, 지나간 추억에 대한 연민과 아쉬움이란 것을 너무도 잘 알았다. 그와 어떻게든 다시 만나고자 해서 뱉은 말도도 아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듯이, 그 사람 역시 마찬가지일 거란 걸 너무도 극명하게 알고 있다. 그러나, 내 생각과 마음은 주인의 의도와 다르게 따로따로 행동해버리고 말았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꼭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았어. 뭘 바라는 것도 아니고, 다시 만날 것도 아니지만, 네가 없던 시간에 나는 너를 생각했었다고, 꼭 전해야 할 것 같았어. 너는 잘 살았으니까 괜찮을 거라 생각했겠지만, 아니 애초에 생각 안 했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랬다고. 오늘만 그런 게 아니라, 헤어진 이후의 몇 번의 연애가 너를 잊을 수 없어서 헤어졌어. 이제 되었어. 이야기했으니까. 이걸로 충분해."

 

그렇게 말한 나는, 뒤를 돌아 원래 가려던 길로 터벅터벅, 주책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을새도 없이 그렇게 꿋꿋하게 걸었다. 앞으로 한발씩 내디딜 때마다, 나는 지금 너에게 속해있던 마음들을 털어버리려고 꾹꾹 눌러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당신이 어떤 표정이었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상상도 못하겠다. 나는 그렇게 앞으로 갔고, 또 갔고, 눌러 담았던 눈물이 터져 나올 때마다 꾸역꾸역 걸음을 옮겼다. 걸었다.

 

걷고,

또 걷고,

또 걸었다.

 

울고,

또 울고,

또 울었다.

 

미어지는 감정들이 사그라질 때쯤, 나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바닥만 보고 걸어왔는데, 어느새 내 옷은 바뀌어있고, 환경도 바뀌어있었다. 왠지 내가 주인공인 파티 같았고, 아직 이 감정을 추스르기엔 벅찬데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얀 벽면, 붉은색 카펫이 깔려있고, 따뜻한 조명과 풍성한 꽃 장식이 있었다. 공간의 크기가 크지는 않지만 천장엔 샹들리에가 있고 잔뜩 꾸며입은 사람들이 그 아래로 스쳐지나다녔다. 멍하니 상황을 파악하려 했고, 불안한 감정과 슬픈 마음이 교차했다. 그때 어디선가 희미하다가 점점 선명해지는 누군가를 보았다. 이내 그 사람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무언가를 내 앞에 건넨다. 네이비색의 상자 속에서 빛나고 있는 형체를 보았다. 화려하지 않은, 반짝거리는 은색의 반지였다. 군중속에 둘러쌓여 나는 한 사람의 고백을 받게 되었다. 이 사람이 아는 사람이긴 하지만 이걸 이 사람이 내게 줄리가 없는데, 왜.. 지.. 왜 하필 이 사람이지 하며 어안이 벙벙했다. 좋은 사람인 건 맞지만 정말 좋은 사람일까를 염려하던 사람. 아직은 서먹하고 공적인 관계일 뿐인 사람. 애틋해질 겨를도 무엇도 없는 사람. 그 사람이 왜 여기에 있지 싶었다.

 

"나랑 결혼할래?"

어라... 왜,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하나 싶은데,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승낙해버린다. 입이 방정이다. 머리는 아직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중인데, 제멋대로 말을 한다. 그리고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들이 얽히고설킨다. 아니, 적어도 데이트 한 번은 해보고 결혼해야 하잖아. 어떻게 그냥 결혼할 수 있지? 연애는 생략하고, 결혼부터 하고 생각하는 건가. 이건 아니지 않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곤 한두 시간을 고민과 걱정을 하다가,

 

"나, 이 결혼 안할래요."

하고는, 뛰쳐나갔다. 신발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는데, 2층의 창문이었다. 맨발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붉은색 카펫의 끝에 있던 바구니를 뒤집어 내용물을 비운 뒤 양 발에 끼고는 폴짝 창문으로 빠져나갔다. 다치기보다, 개운했다. 힘껏 뛰어내렸는데 겨우 2층높이라니 다행이었다. 넘어지지 않고 착지도 잘했다. 그러다가 또 슬퍼졌는데, 미안한 마음이 컸다. 승낙할 때는 언제고 이렇게고 마음이 쉽게 바뀌어, 면사포 휘날리며, 하얀 웨딩드레스를 손에 쥐고 하얀 바구니를 발에 끼운 채 아스팔트 위를 달렸다. 자유롭기도 했다가 미안했다가 슬펐다가 속상했다. 울었던 걸까. 마음으로 울었던 걸까.

 

너무도 선명했던 꿈을 깨고 일어났는데, 깨고 싶지 않았다. 꿈속에 사무치게 그립던 사람이 나오고, 꿈속에선 결혼하자는 이야기도 듣고, 두근거렸다. 물론 슬프고 애통하고 비참하고 아쉬움이 가득했던 마음들도 들었지만, 현실이라고 다르지 않으니까. 차라리 꿈이면 아무런 제약도 없고, 꿈에서 계속 살아갔다면 그 길 끝은 어떻게 마무리되었을까.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하고 꿈이 현실이 되고 그러면 안 될까. 그래도, 꿈에서라도 그 사람을 보고 마음을 전하고, 울기라도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러나, 이젠 어떤 노력도 해서는 안 되고 할 수 없다는 걸 아니까 더 마음이 애절하고 미어져서, 꿈이 깬 아침에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다시 꿈속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슬프게도 아침이었다.

 

 

 

 

#이건꿈 #생생햇던꿈 #오늘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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