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노여움_쓰밤n김남열

'시기나 질투가 많은 타입입니다.‘
우연히 들린 인터넷 사주사이트가 알려준 내 성격. 예전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그날은 한참 동안 그 문장에 머물렀다. 장난으로 검사를 하던 고가의 검사를 하던 시기나 질투가 많다는, 혹은 그와 비슷한 결과를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스스로도 그렇다고 마음먹기도 했었고. 그럼에도 문장에 머무른 건, 스스로를 객관화해 보려는 노력이다.
인생의 절반 이상 동안 내 정신 저변에는 '명심보감'의 이념들이 촘촘히 깔려있었다. 서른이 넘어서부터야 유교적 이념이 나를 갉아먹는다는 걸 알게 됐지만, 그 전에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대학 졸업까지는 책을 놓았지만, 어린 시절엔 책을 상당히 좋아했다. 약간의 편식은 있었지만 독서 분량으로는 반에서 2위 수준이었다. 좋아하는 책은 여러 번 반복해서 읽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많이 읽은 책이 과학 백과사전이고, 두 번째가 명심보감이다. 동경했기에 많이 읽었고, 자연스레 인격을 형성했다. 그런 덕분에 어느 직장이건, 단체건 인정받아 온 건 사실이다. 지금은 원치 않는 삶의 방식이지만.
마인드가 바뀐 것은 서른 중반에 가까워지며 생긴 문제 때문이다. 유독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타입이었는데, 나이가 들자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부터는 한주 이상 운동을 쉬어 본 적이 없는데도, 무기력과 체력 저하가 눈에 띌 정도로 보였다. 대학시절 금전 문제로 제대로 된 끼니를 해결하지 못해 신체가 망가진 것이 한몫했겠지만, 그것만 원인으로 보기엔 시시각각 달랐다. 주로 기복의 문제였는데, 감정에 따라 체력이 급감하고 얼굴색마저 거뭇해졌다. 억압 때문이란 걸 알게 된 건 서른 중반에 다달해서였다. 사회생활에 좋은 일만 있을 수 없다. 하루에 수십 번씩 짜증도 나는 게 사회생활일진대, 나는 대부분의 감정을 억압했다. 그렇다고 모든 걸 억누른 건 아니고 짜증은 많이 낸 편이다. 억눌렀다고 생각하는 주된 감정은 분노에 관한 감정이다. 짜증을 내는 방향은 스스로에게 이거나 사물이었기 때문에 딱히 억누르지 않고 표출했지만, 분노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마음대로 표출할 수 없었다. 근래에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인간이 선택적으로 한 가지 감정만 억누를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 내가 당시 빌어먹을 유교사상에 지배당해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 분노를 억압하겠다고 한 행동이, 분노만 억압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엮인 많은 것들을 억압해 버린 것이다. 꾹꾹 눌린 감정은 올바르게 해소되지 못했고, 결국 신체에 위험 신호까지 보내왔다.
분노는 억압할 감정이 아니다. 해소해야 한다. 원인을 찾아야 하고, 상대가 문제라면 상대에게 정중히 표현하거나, 혹은 그러지 못할 경우라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해소해야 한다. 암을 치료한 지인이 말했다. "우리는 너무 참고 산다. 할 말은 해야 하는데." 암을 치료 중이 사람들끼리 모이는 모임이 있는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라 한다.
지금까지 분노의 억압으로 인한 문제를 말했고, 초입에 언급한 내용을 이어가면. '시기나 질투가 많은 타입입니다.'를 보고 스스로를 객관화해 보려고 노력했다는 건, 다른 방향에서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서두에 시기나 질투가 많다는 평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사실을 굉장히 많지만 몰랐던 건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심리 테스트 따위는 속여온 거다. 의도적으로 속였다기 보단, 동경의 대상이 시기나 질투는 하지 않는 인생이었기 때문에 내 본성과는 관계없이 나는 그런 사람이라며 스스로를 속인 거다. 인격을 사회적으로 갈고닦은 성질이라고 한다면, 성격은 타고난 성질이다. DNA나 뇌 구조상 성격이라는 특질은 일부 정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시기나 질투를 하지 않는 인격을 가져야 했던 것인데, 그것이 스스로의 성격이라 착각해온 거다. 분노도 그렇다. 사회가 지향하는 올바른 인격의 모습으로 보자면 참거나, 정중한 표현으로 해소하면 된다. 하지만 남보다 분노의 사이즈가 크다면 그 정도로 해결이 안 되는 거다. 참지 않고, 할 말을 한다고 해도 해소가 안 되는 거다. 분노를 예를 들었는데, 분노가 남보다 많은 타입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시기나 질투가 남보다 많다는 것에는 갸우뚱한다. 그러니 단순히 억압의 문고리를 여는 것 외에 또 다른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다.
'혹시 내가 남보다 시기나 질투가 많은 건 아니었을까?‘
내 방법은 받아들임이었다. 시기가 많다면, 남보다 시기가 많다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만 해도 생각보다 많은 게 해소됐다. "축하해" 보단 "와, 정말 부럽다 나도 하고 싶다."라고 표현하기만 해도 마음이 한결 편하다. 물론 축하한다는 표현 만으로도 진심이 표현되는 사람이 있다. 약간의 시기나 질투가 있을 수 있겠지만, 어쨌건 표현하는 것 자체로 해소되기도 하니까. 한데, 나 같은 타입 그보다 조금 더 스스로의 욕심을 드러낼 말을 곁들여야 했다. 비꼬는 표현이 된다면 심각한 문제지만, 적당한 솔직함은 되려 상대의 호감을 사는 장점이 되기도 하니까. (솔직함과 배려는 구분해야 한다.) 정말로 그런 감정이 남보다 많은지는 알 수 없다. 감정의 강도를 측정할 수는 없으니까. 심지어 나의 '시기'감정과 남의 '시기'감정이 동일한 감정인지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남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한다. 요즘 최고 이슈인 인공지능의 머신러닝, 딥러닝 기술은 내용은 복잡해도 결국 고양이냐, 개냐의 문제다. 수많은 사진을 기준으로 고양이인지 개인지를 구분해 내는 게 기술의 목표다. 스스로를 알아간다는 것도 그렇다. 거울 앞에 서서 뚫어지게 본다고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찾은 본인은 이상향일 가능성이 높다. 이상향의 모습과 실체의 간극이 크지 않다면 다행이지만, 벌어짐이 심하면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비교한다. 사회적 지휘나 능력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알기 위한 비교를 한다.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내공은 스스로를 객관화하려는 노력에서 쌓인다.
#시기 #질투 #객관화 #노력 #비교
분노/노여움_정뱅이n김은정

“노동절인데 왜 나가야 해? 제발 남들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쉬었으면 좋겠어.” 등 뒤로 진희의 잔소리가 지나갔다. 월요일인 오늘은 노동절, 수요일에는 석가탄신일, 금요일에는 어린이날이 있어 화, 목 이틀만 쉬면 무려 9일을 연달아 쉴 수 있는 거였다. 하지만 어디 현장 일이라는 게 빨간 날 쉴 수 있느냔 말이다. 셋째를 임신한 진희의 서운함도 이해는 가지만, 일하러 나가는 내 발걸음이야 오죽 무거울까. “대신 어린이날 쉬잖아. 주말까지만 참자.” 진희의 등을 쓸어내리며 달래었다. 타지에서 홀로 육아하는 진희의 고생을 알기에 더 많이 벌어야 한다. 애 셋 키우려면 쉴 수가 없다. 그게 현실이다. 이번 현장이 좀 길게 잡힌 터라 다행히도 어린이날에 휴무를 뺄 수 있었다. 연휴 막바지라 비싸지만 첫째 민이와 둘째 정훈이를 생각해 어렵게 예약한 놀이공원 리조트였다. 이번 주만 잘 지나면 된다.
거제의 5월은 북쪽의 여름과 같다. 봄은 이미 지나갔고, 정오에는 작업복이 땀으로 흠뻑 젖는다. 머슴밥을 올려 주린 배를 채우고 믹스커피를 한 잔 들었다. 함바집을 나오자 인부들이 철거된 시스템에 걸터 앉아 쉬고 있다. 김씨 아저씨와 이씨 아저씨도 나란히 앉아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이 잘 받쳐줘 오전 작업이 수월하게 진행됐다. 이번 주 공정만 무사하게 마치면 첫 가족여행을 마음 편히 다녀올 수 있다. 그런 욕심에 조출과 야간도 신청했다. 육십 넘은 노인네들하고 작업 안 한다는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 어렵사리 팀을 꾸린 것이라 걱정이 많았다. 괜한 걱정이었다. 김씨 아저씨와 이씨 아저씨 모두 노가다판에서 뼈가 굵어 일머리가 밝았다. “이 정도면 수요일에도 마감 치겠는데?” 너스레 떨며 다가갔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치듯 천둥소리가 났다. 크레인이 기울었다.
그리고 진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발 남들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쉬었으면 좋겠어”
https://www.geoj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4927
분노/노여움 _ 문재호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아 분노하고 노여워 했으나 누구나 마찬가지다.
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을 분간하고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분노해서 좋은 게 있고 아닌 게 있다.
분노가 원료가 되어 이로운 행동을 이끌어 내면 + 이롭지 않은 행동을 이끌어 내면 해로울 수 있어.
사람에 대한 지속적인 분노/노여움은 건강에 좋지 못하다.
틱낫한의 화, 빅터 챈의 용서 같은 책을 읽으며 누군가에 대한 화, 분노/노여움이 있으면 이를 읽고 가라앉히는 것도 방법이 되더라.
타인에 대해 감정의 응어리/분노/노여움을 가지는 건 개인 정서에 좋지 않다.
분노는 호감/사랑이라는 감정과 양면성을 띄기 때문이다.
분노 대상에 무관심하는 게 건강에도 정신적으로도 이롭다.
사람이 아닌 사안, 사회적 문제라면 대중의 분노를 이끌어내 이를 수정하는 게 최선이겠지.
분노/노여움_smile n박진오

불편하게 하는 것들, 또는 그런 이들은 공격 부메랑을 맞는다. 그것도 몇 배나 빠른 속도로 큰 불행을 실은 부메랑을 세게 맞는다.
가령 누군가가 조직이나 모임에 새로 들어 왔을때 슬며시 악행을 저질러 부메랑에 맞기를 자초하는 이가 있다. 작은 권력이랄까, 작은 결정권자랄까, 일차적 우둔하고 꼬인 자랄까. 실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자이건만 어리석어서 자신은 그걸 모른다.
익지 못한(여물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부끄럼은 알아야 한다. 물론 자신도 부당함을 당했을 수 있지만 끝끝내 극복하지 못한 경우다. 성악설의 대상자라 해야 하나. 부당함을 당하지 않았음에도 악행을 저지르는 이도 있다. 정신이 건강하지 않은 자라 여겨야 하나. 예를 들어 신참에게 불편한 일이나 꺼리는 자리를 부여하는 멍청한 일처리를 부끄럼없이 자행해 버리는 무례함이 바로 그것이다. 타인의 눈엔 다 보이는 것을, 정작 자신만 자신 눈을 가리고 아웅한 것을 알지 못하다니, 자신을 속였다고 타인이 모르리라 여기다니 참으로 비루한 꼴이다. 몇 배의 큰 불행을 스스로 닥치게 하는 행동이다.
누군가의 악행(불편함을 초래하는 행동)에 분노하지 않기를 권한다. 감정이 끓어오르기 마련이지만 조절하기 바란다.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하지 말라고 알려 줄 용기가 없었거나 어쨌거나 미리 막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 누구도 도움을 줄 수 없을 만치, 이미 저질러버린 악행에 즉 어쩔 수 없는 타인의 무모한 나쁜 짓에는 화내지 말고 지켜(노려) 보자. 그러면 대가(불운한 일)나 처분(처벌)과 같은 책임을 실은 부메랑이 그들에게 날아갈 것이다.
세상의 이치다.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악은 더 큰 악으로, 선은 더 큰 선"으로 돌려받는 것이다.
분노/노여움_보석57n박진희

기쁨과 즐거움, 행복한 순간들은 곰곰이 생각해야 하나씩 떠올릴 수 있었는데,
분노감을 느꼈던 순간들, 상황들은 단번에, 한꺼번에 떠오른다는 사실이 슬프다.
내 마음속에 이렇게 많은 분노들이 언제, 어떻게 자리를 잡았는지.
나는 사람을 사람으로서, 그 자체로 존중하지 않는 태도에 분노한다.
나는 존중이 결여된 사회를 매일 마주하고 있다.
착취와 학대가 만연한 세상을 매체를 통해, 때로는 내 삶의 현장에서 마주하는 것은 너무 고통스럽고 공포스럽고 분노를 치밀어 오르게 한다.
부모(자식)가 자식(부모)을, 상사가 직원을 동료가 동료를, 친구가 친구를, 일반인이 장애인을, 남자(여자)가 여자(남자)를 무시하고 멸시한다.
인간성 상실의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살다보니, 나의 분도도 그만큼 깊어진 것 같다.
사람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 이다지도 어려운 일인가.
나보다 약하다고, 나보다 돈이 없다고, 나와 다르게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소유권(인사권)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함부로 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함부로 할 권리를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암묵을 넘어서 너무 뻔뻔할 정도로 당연하고 당당하게.
그리고 그 권리를 승리자의 전유물인양 멋대로 사용한다.
이런 세상을 보며 분노하지 않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나는 너무 화가난다. 너무너무 분노한다. 그리고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이 아프다.
서로에 대한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존중과 연대의 마음을 갖고 살수는 없는 것일까..
분노/노여움_너부리n이상미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면서 글 하나씩 써나가는게 소주한잔 입에 탁. 털어 넣듯 명쾌하게 떨어진적은 단 한번도 없었지만 스스로의 감정을 들여다보며 쓴다는 것에 매번 곤욕스러움을 느껴 뒷머리를 쥐어뜯거나 지인을 붙잡고 구시렁거리기를 반복했었다.
메마르기가 뜯어버린 입술 각질이 더 촉촉할 지경인 나의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안나서 기억과 감정들에 의지해가며 물없이 밤고구마 삼키듯 꾸역꾸역 써나가는 중이었는데,
분노라는 감정카드를 보았을땐 정말 아아무 생각도 들지않아서 마감시간이 발등을 다태우고 발목까지 올라온 지금까지도 한줄을 제대로 쓰지못해서 무릎이 타고있는걸 보고만 있는 중이다.
이렇게 무릎이 타닥타닥 타는걸 그냥 보고만 있는 이유를 어설프게나마 고백해보자면 나는 분노를 제대로 표출해본적도 그 감정의 깊이를 제대로 들여다본적도 없이 회피하거나 둘러가거나 두루뭉실하게 넘기거나 백기를 흔들며 무대밖으로 사라져 버리는 쪽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렇듯 살면서 억울한일 화나는일 미치고 팔짝 뛸법한일 혹은 나로 하여금 위법의 경계선위를 걷게 만들고 싶어지게 하는 일을 겪지 않았겠냐만은
그런 순간마다 스스로에 대해 느끼는 건 나의 끓는점이 대체로 높은것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분노하지 않았던건 아니다. 그런 감정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건 아니지만 흔히 말하는 표출의 단계로 감정이 끓어오르기까지 너무 많은 땔감이 필요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비단 분노만의 일도 아닐것이다.
기쁨이나 슬픔같은 모든 감정들에 대해서도 표출의 단계까지 감정 혹은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을 땔감을 던져넣다보면 결국에는 뒤늦어서 남들보다 반응이 늦거나 미적지근한 모습만 보이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나름의 땔감을 들이부어 감정을 끌어올려도 감정의 진폭 자체가 그다지 크지 않아서 대체 무슨 이딴 식의 효율인가 싶게, 테이블에 앉은 모든사람들은 쓰나미급의 파도를 만들고 있는데 나 혼자 계곡에서 바지를 무릎까지 동동 걷어올린채 발목만 참방거리면서 아이고 물이 많이도 튄다며 찡그리고 있는 기분이 들고만다.
30대를 넘어서면서 가끔씩듣게 되는 말중에 하나가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다거나 인형(바비인형아님주의)혹은 한국말 잘하는 외계인 같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런얘기를 들었을 때의 대화주제는 대부분 상대방의 깊은 빡침에 내가 따라가지 못하는 순간들이었다. 기쁨이나 슬픔은 살아온 짬바로 대응 매뉴얼 비슷한 게 있다고 치더라도 분노에 대해서는 나의 비루하기 그지없는 감정 폭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던게 아닐까.
물론 나에게 해명의 기회를 준다면 난 정말 최선을 다해서 대답하고 반응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에버랜드 티익스프레스급의 감정 폭들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청룡열차급 감정 폭은 지금 장난하냐는 식의 반응으로 밖에 돌아오지않았다.(심지어 난 청룡열차도 중간에 앉아있을사람이고)
어쩌면 그래서 이번 함께쓰는 밤이 유독 힘에 겨웠는지 모르겠다. 부스러기만 남은 상상력을 대신해 감정들에 대해 쓰려니 이렇게 밋밋하고 무색무취할 수가 없어서 자꾸만 뒷머리를 긁적이게 되었는지도, 감정조각들을 그러모아 더듬더듬 글을 기워내야 한다니 한숨이 절로 나올 수밖에.
한편으론 궁금해지기도 한다, 나도 저렇게 분노할일이 생기면 저들처럼 반응을 보이게 되지않을까 그저 내가 운이 살짝좋아서 경험 부족으로 살아온게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 혹은 지독히도 눈치가 없어서 내가 타깃인게 분명한 공격들과 비난을 못알아챔으로써 철벽방어를 하며 살아온것일까. 지금 이순간도 누군가는 나의 눈치없음에 뒷목을 잡고 쓰러지고 있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
이만큼의 글을 가장한 넋두리를 풀었음에도 여전히 내게 감정이란건 색맹을 가진 사람이 테스트책을 외워서 아슬아슬 통과해가며 살고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혹시 티가날까 눈치챌까 싶어 매순간 지금 이반응 정도가 맞는건가 주위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게 되는.
그리고 대체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는 나는 조용히 백기를 꺼내 흔들며 이번 함쓰밤무대뒤로 사라지는 것으로 마지막을 대신하려한다. 부디 이글을 읽게 되시는 다른분들이 시간낭비를 했다며 분노하지만은 않길 바라며.
#지각생 #한글패치완료_외계인
분노/노여움_은비n장은비

<호의는 권리가 될 수 없습니다.>
악에 받치고 쓰는 글이라면, 이 글은 엄청난 빡침을 경험하고 나서 쓰는 글이 되겠다. 좋은 기억들만 남기자고 다짐했던 블로그 개설 목적에 위배되는 주제이긴 하나, 이번 주 주제이기도 하고 무슨 글을 적을까 고민하던 찰나에 쌓이고 쌓이는 홀대가 나를 분노케 했다. 보통 좋은 사람들에게 좋아하는 것들을 건네며 마음을 전하는 쪽이다. 대놓고 좋아한고 말을 하기도 하지만, 사람에 따라 좋아한다고 말하는 일이 불편해하기도 하므로, 물건으로 마음을 잘 표현할 때가 많다. 행여 내 마음을 몰라줄까 싶어서 그러는 날들이 많았다고 해야 할까. 유독 다른 사람들에 비해 선물을 많이 하는 편이기도 할 만큼 베푸는 게 좋은 사람이다. 줄 게 없어도, 가진 것 중 일부를 주는 것은 마음이 조금 아쉽긴 해도 상대가 필요해 보인다 싶으면 건넬 수 있다. 너무 비싸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 지 말고 너 해”라고 손사래를 치기도 하고, “바보 멍청이야 돈 그만 써”라고 하기도 하고, “정신 차려야 해. 너 지금 이거 주면 내가 너 뒤통수칠 거다”하고 지레 겁주는 이들도 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주는지 너무 잘 아는 사람들. 그리고 말하다 보면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는 사람들, 내가 이렇게 이야기한 게 너에게 상처가 되는 거냐고 되레 물어볼 줄 아는 사람들. 오랜 세월 함께 하다 보니, 의도와 다르게 내가 곡해하여 해석하게 되는 그 생각들을 바로잡아줘야 한다는 걸 너무 잘 아는 이들이니까 ..
서론이 길었다. 각설하고, 이번 주제에 맞게 분노에 대해 쓸 예정이다. 나는 분노를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요 근래 몹시 분노할 일이 생겼다. 마음속에서는 극 대노의 상황이었지만, 특정 다수의 사람으로 인해 극대노 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또 내가 나에게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사건이겠다. 일부 이야기하자면, 요 며칠 재정의 여유가 생겨, 그간 좀 챙겨주지 못한 사람들을 곧잘 챙겼다. 일단 나 자신을 위한 투자를 하며 나를 챙기긴 했었고(그 사이 살이 많이 쪘다), 그러다가 나 혼자 행복해서 무엇 하나 하고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을 주변에 나누곤 했다. 내 것을 구매할 때 갑자기 생각난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혹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스콘을 받았다거나, 쿠키를 받았다거나, 갑작스레 귀걸이를 받는다든지, 양말 등등 어떤 물건을 받았다면 당신을 내가 참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표현한 것이다. 자주 보지도 못하지만, 내 마음에 문득 가끔 당신이 생각나고, 어떨 땐 고마운 사람이었다가, 어떨 땐 보고 싶고 미안한 사람이라는 마음을 그렇게라도 대신 표현한 거다. 갑자기 연락을 한 경우도 그러하다.
아, 또 서론이 길어버렸다. 또 각설해야겠다.
어쨌든(휴),
세상이 좀 더 살만한 곳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나인데 요즘처럼 내가 보인 내 나름의 호의가 더 이상 호의가 아닐 때 분노가 치민다. 아주 요즘이 딱 그랬다. 나도 없는 살림 중에 식사를 대접하고, 좋아하는 마음 담아 좋은 것으로 선물했는데, 이 노력들이 악의로 변질되는 일을 겪었다. 이를테면, 내 호의가 너를 만날 때 당연한 것은 아닌데, 당연한 것처럼 "오늘은 뭐 없어?"를 시전 한다거나, "너는 원래 내가 무슨 말만 해도 다 맞장구 해주잖아, 오늘은 왜 그래?"라는 식의 응대라던가, 나의 선물이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며 다음엔 뭘로 부탁한다거나, 나에게 체험단을 맡겨둔 것도 아니면서 "요즘은 체험단 안 해? 같이 갈 수 있어. 좀 해 ~ "라는 말을 너무 서슴없이 할 때 나는 어떻게 응대를 해야 할지 어안이 벙벙하다. 혹은, 밥을 사줬는데 다음 주도 부탁한다는 뉘앙스라던가(휴), 내가 사주고 그 이후 연락이 드문드문 온다거나, 어딘가 모르게 카카오톡에서 무시당하는 기분이 드는 듯 한 기운들을 받기도 했다. 이 모든 상황에 나는, 관계가 틀어질까 봐 하는 마음으로 쫄보가 되어 그저 웃으며 자연스레 넘어가긴 했다. 애초부터 내 성향이 당신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한 사람이긴 하나, 상대에게 무엇을 바라고 해준 호의가 아니었기는 하나, 내가 "당신에게 베푼 내 마음"을 무시해도 된다는 것은 아닌 건데, 왜 그들은 모르는 것일까. (모르는척하는 것일까..?) 상대는 자연스레 우스갯소리로 뱉었던 말이었다고 할지라도 무심코 뱉어낸 그 작고 작은 코딱지만 한 돌멩이로 인해 피부에 스크래치가 나고, 살을 파고들었다.
그럴 때 분노의 대상은 자연스레 나로 향한다. 상대에게 향해야 할 화살을 내게 돌린다. 저 사람은 원래 저런 사람이었구나 하고, 내가 에너지를 쏟은 일을 후회한다. 조금 덜 사랑할걸. 조금 덜 마음에 줄걸. 하고는 마음을 닫아버린다. 당연히 사람이 살면서, 마음의 크기나 색이나 온도, 결 등등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겪었던 삶이 다르다. 인간의 특징을 분류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그 인간을 구성하는 전부라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 다른 삶을 사는 거고, 서로 맞춰간다 이야기하는 걸 알고 있다. 알고 있으니 화를 낼 수가 없다. 목구멍까지 분노가 차오르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각각의 사람들이 너무나 달라서 다른 사람들이란 걸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니까. 그러나 역시 나의 능력이 너의 당연한 권리가 되지 않고, 나의 지갑이 널 위해 열린 지갑이 아니며, 그 모든 행위가 온전히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인데, 당신이 내게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닌데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다. 나의 행위는 나에게 속해있다. 당신들의 사항이 아니다.
글을 쓰다 보면, 몹시 불편하고 불쾌한 감정이 남아 속이 상한다. 추후에 이런 감정적 두려움이 고스란히 느껴질까 염려된다. 좋은 사람 같아서 일정 거리를 두고 지켜보다가도, 마음에 두려움이 덜컥 앞선다. 저 사람도 곧 나에게 익숙해져서 호의를 권리로 받아들이진 않을까 한다. 앞뒤가 다른 사람이라고 놀릴지도 모르겠다. 불편하고 악한 감정이긴 하나, 그것이 그 사람을 향한 모든 감정이라고 이분법적 사고를 내세울 생각은 없지만, 어딘가 벽을 만들어버리는 것은 사실이다. 서두에 잠깐 언급했지만, 당연히 주변에 좋은 사람도 많다. 서로를 이해해 주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겠지만, 보낸 마음에 대한 피드백이 이용해먹으려는 나쁜 생각이거나, 별반 마음을 쓰지 않는 것들이라면 지친 나도 더 이상의 표현은 그만둬야겠다 했다. 그러다 보면 주변에 아무도 안 남을 수도 있겠지만, 행복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 서로 마음 전하기도 바쁜 세상이니까. 분노는 이쯤으로 그만 넣어두어야겠다.
분노/노여움_첫문장n최현수

안개 너머에 뭐가 있을지는 모른다. 그렇다고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되돌아가기에는 이미 먼 길을 왔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을 할 때는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이렇게 외길을 걸어야 할 때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앞만 보면 된다. 하지만 길이 수 갈래로 나 있을 때는 혼란스러워진다.
어느 쪽이 맞을까.
문제에서 답을 찾기 위해 애쓰고, 내놓은 결과에 실망한다. 내가 선택했으므로 아무도 원망할 수 없다. 물론 애초에 그러한 문제와 맞닥뜨린 것은 내 선택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운명비극과 성격비극의 차이점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성격보다는 선택비극이라고 말하고 싶다. 말하자면 운명비극은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신의 잘못이야.’와 비슷한 것이고, 선택비극은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내 잘못이야’인 것이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므로 결국 우리는 자신의 삶이 운명비극인지, 선택비극인지 알 수 없다. 내가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도 같은 결과가 도출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애초에 ‘내가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이라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없다.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된 탓을 운명에게 돌리든, 나 자신에게 돌리든 그건 내 자유인 것이다.
하지만 정말 이렇게 선택지가 단 하나뿐인 듯한 길을 걸어갈 때는 그저 여기에 집중하면 된다. 아무도 나를 비난할 수 없다. 이 앞에 뭐가 기다리든 간에 나는 전진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다른 시간대를 헤매지 않고 온전히 현재에 있다. 후일에 내가 이 일을 두고 내 자신을 탓하는 일도 없겠지. 왜냐하면 누가 봐도 이게 최선이니까.
#일방통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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