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_쓰밤n김남열

중학교 2학년까지 일 거다. 아버지가 직접 머리를 깎아주시던 때가. 중학교 시절부터 옷매무새에 관심이 많았지만, 아버지가 깎아주는 걸 싫어하거나 거부했던 기억은 없다. 항상 짧고 동그란 모양으로 잘라주셨는 데, 마음에 들고 말고를 생각하지도 않았던 걸로 기억된다. 스스로 옷을 고르고, 머리를 만지기 시작한 때가 아마 중학교 3학년부터인 듯한데, 어머니는 자식이 자기 취향대로 무언가 하길 원하셨는지 그때부터는 이발도 이발소에서 하고 오라고 하셨다. 아버지 입장에선 체력도 떨어지고, 도구 손질도 귀찮으셨던 것 같다. 젊어 이발소를 하실 때부터 가지고 계시던 도구들인데, 10년이 훨씬 넘었으니 이미 한참 전부터 귀찮으셨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깎아준지 12년쯤 흘렀을 때였다. 뜬금없는 생각을 했는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머리를 맡기고 싶단 생각이었다. 아버지와의 추억은 그게 유일하니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그것뿐이니까. 여느 시골 가정처럼 우리 집도 아들과 아버지 간 교류가 무척이나 부족한 집이다. 이제 와서 깨달았다해서 당장 한마디 붙이기도 서먹하다. 그래서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 시간을 다시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것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생각을 떠올린 지 10년이나 흐른 지금, 무엇도 행해진 것 없다. 겨우 작게나마 변한 나의 태도 정도일까. 설사 아버지께 부탁하더라도 노화하고 굽은 마디들 때문에 불가능하겠지. 무엇보다 나부터 문제다.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일그러지니까. 10년째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꿈으로 꾸는데, 그곳에서 조차 나는 하염없이 울고 있다.
#아버지 #추억 #이발
슬픔 _ 문재호

정직하지 않은 부동산 중개업자로 인해 천만원 넘는 돈을 날릴 뻔했다. 16일까지 전세대출 가부 여부를 집주인에게 알려주고 난 뒤 계약해지시 계약금 반환을 요구할 수 없다는 조항이 계약서에 적혀 있었다. 당일 날 이 단서조항을 집주인에게 연장해달라고 하면 별 문제 없었으나 부동산 업자는 그러지 않았다.
계약한 부동산이 아파트가 아니었고 공시가격 150%보다 3천만원 높은 금액으로 집주인이 전세금을 받고자 했다. 처음 해보는 전세 계약이고 살면서 크나큰 사기를 당해본 적이 없어서 부동산 공인중개사가 어련히 잘 일 처리해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중개사무소는 세입자 보호를 하지 않았다.
16일이 지나고 난 뒤 계약금을 이미 날린 거라고 가정하고 난 뒤 이를 되찾는 데 노력하는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중개사무소 측은 자신의 거래선을 숨겼다. 중개업자는 감정평가서를 법무사-> 감정평가 법인에 의뢰를 했으며 나(세입자)나 공인중개사 사무소도 감정평가서를 볼 수 없다고 거짓말했다. 만약 은행 측에서 감정평가를 감정평가 법인에 의뢰했다면 맞는 말이나, 감정평가 의뢰 주체는 부동산 중개사무소과 임대인 측이었다.
거짓말의 정황 22일 알아채긴 했으나 혹여 대출이 승인되지 않아 최종적으로 부동산 중개 사무소를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한다고 해도 이긴다는 보장은 없었다. 8일전 토요일 부동산 중개 사무소 사장으로부터 감정평가 의뢰에 대한 수수료 납부 영수증을 보여 달라고 한 뒤 이를 내 휴대폰으로 보낸 게 신의 한수였다.
결국 월요일 계약금 전액을 돌려받았다. 가끔 긍정회로 돌려서 내가 보고 싶거나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하다가 호되게 당할 뻔 했으나 좋은 인생 경험 했다.
슬픔_smile n박진오

한 사람의 본심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 본심은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엔 친절한 모습으로 다가와서 줄곧 호의적이었던 사람이 본심을 드러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부끄럼 없이 본심을 드러내는 이도 있습니다.
인간은 보통 어떤 시점에서 본심을 드러낼까요.
갖지 말아야 할 마음과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어떤 경우에 자제하지 못할까요.
자신이 결정한 것만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봅니다. 자신이 내린 결정만 옳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에겐 그 무엇도 권하지 않게 됩니다. 권하지 않는 직접적인 이유가 어떠하든, 싸늘히 식어버린 가슴을 소유한 사람들을 주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만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자신만 챙기며 사는 차가운 사람들과는 함께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 어떤 누구와 함께이든 어떠한 상황이든 저는 저를 믿고 살았습니다.
누군가가 오랫동안 보여 줬던 모습과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면 그 사람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선한 말을 하면 선한 사람인 줄 착각합니다. 선한 행동까지 보여줘야 선한 사람인데 말입니다.
보통 타인의 단점도 수용할 수 있을 때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의사(의지)가 있다고 봅니다. 그저 단점일 뿐이라면 그 정도는 수용하고 만남과 관계를 계속 유지해도 되지만 단점이 아닌, 즉 단점이 나빠져 악의가 되어 버린, 악의를 품은 이라면 그런 사람은 피해야 합니다. 자신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사람은 관계 속에 악의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좋은 사람은 해가 될 일을 권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잠깐 만나는 이에게도 불쾌감을 주는 사람이라면 바로 피해야 합니다. 신인 양 자신이 타인을 바꿀 수 있다는 오만함을 버린다면 주변에 선한 이들로 가득해질 겁니다. 한 사람의 인간관계가 바로 그 사람 자체를 대표하잖아요. 자신의 지인이 곧 자기 자신이기도 하고요.
성인들은 적과 아군을 분명히 구분했습니다. 참 어이없지만, 인간은 대부분이 우둔하기에 극히 드문 지혜로운 자를 중상모략합니다. 자신의 우둔함과 모자람을 감추기 위해서죠. 스스로 자신은 사람 중심이라고 말하고선 행동으로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생각을 실천할 수 없어서 말로만 그런 사람인 척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옳은 건 말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죠. 나쁜 건 말만 해도 어느새 자신 곁에 자리 잡기 때문에 말을 조심하거나 가려서 해야 합니다. 하지만 옳은 일은 말보다 꾸준히 실천해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은 오래도록 내려오는 진리입니다. 그러기에 말로는 ‘함께’를 주장하면서 행동은 ‘함께가 아닌’ 사람들은 거짓 몸짓을 감추려 해도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이 자동으로 툭 튀어나옵니다.
모든 걸 단순하게 생각하여 인간관계를 무조건 칼처럼 자를 순 없습니다. 좋은 점도 있으니까요. 인간관계에선 정성스럽게 보낸 세월도 있기 마련이죠. 이렇게 미련을 가지게 하는 대상은 최종적으로 성격(인격) 장애를 가진 사람인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시작하는 초창기에는 아주 친절하게 잘해 주었어도, 나중에는 서서히 불친절해지면서 괴롭히는 행동 등 변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럴 때 달라진 모습을 쉬이 용납할 수 없어도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성격(인격) 장애가 있는 사람이 가진 대표적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사생활을 적당히만 공개하고 완전히 공개하지 않는 걸 권장합니다. 어차피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불편한 사적 얘기는 경청하지도 않고 남의 일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없는 말도 만드는 사람들 투성이인데, 타인의 불행한 사생활은 그저 뒤에서 더 도마질하여 가볍게 다시 떠벌릴 뿐이지요. 본의 아니게 들었을지라도, 듣는 이가 내색하지 않았다 하여도, 어찌 되었든 타인의 불행한 사생활은 듣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습니다. 심장에 감기가 걸릴 정도로 따끔하죠. 누군가가 생각 없이 투척한 사생활 내용을 부지불식간에 들은 사람은 그 내용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대응 차원의 일환으로 도마질과 떠벌림으로 해소합니다. 좋든 나쁘든 어떻게든 당사자에게 부메랑을 날릴 수 없는 상황도 있기 때문이지요. 이는 투척 받은 걸 그대로 돌려줄 수 없을 만큼 슬픈 사연일 경우 또 다른 타인에게 버려서 해소하는 꼴입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더니’, 스스로 이겨내야 할 자신의 사생활을 아무 상관없는 타인에게 그것도 불시에 투척하여 괴롭혔기에 결국 그 사실을 주변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됩니다. 조금씩 나누어진 파편일지라도 불행을 퍼트리는 악순환이지요.
지극히 사적인 얘기(심각한 사생활)를 말하고 싶으면 상담을 받으면 됩니다. 일반 사람들은 상담이나 정신의학에서 전문가가 아닙니다. 지인에게 심각한 사생활을 얘기하는 건 도움이 아니라 오히려 해가 됩니다. 그러니 일반적인 사생활은 지인과 대화로 풀 수 있지만 지극히 사적인 얘기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때 말하는 지극히 사적인 얘기는 몹시 힘들고 불행했던 개인사나 부도덕했던 행위 등을 일컫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얘기를 한다는 건 타인을 쓰레기통 취급하는 거지요. 누구든 일반인은 심리 계열 전문가가 아니므로 그런 수위의 얘기를 들으면 감정 조절을 할 수 없습니다. 애석하게도 그런 얘기를 들은 타인이 심장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타인의 불행일지라도 듣는 순간 끔찍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얘기를 들은 타인도 당사자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불편해지고 기분이 상하여 온몸이 괴로워집니다. 심하면 타인에게서 들었던 괴로운 기운이 남아서 그와 비슷한 나쁜 일이 주위에 옮겨지고 또 다른 타인도 불행해집니다.
타인의 인생사는 타인의 몫일지라도 세상엔 해선 안 되는 행동이 있는 법입니다. 자신의 불편한 사생활을 내뿜듯 얘기하여 타인을 괴롭혀선 안 됩니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은 행동입니다. 상한 감정은 시시때때로 바뀐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부메랑에 무얼 싣고 언제 어떤 속도로 되돌아갈지 모르는 일이지요.
타인에게 지극이 사적인 걸 말하는 순간, 타인은 부담을 느끼게 되고 결국은 모두가 부담스러워집니다. 자신의 비밀을 드러낸 후 상대(=상대방, 타인)도 말해 주길 바라는 경우도 있습니다. 상대에겐 그런 종류의 비밀이 없을지라도 말입니다. 이때 애써 호응할 필요는 없습니다. 불편한 스토리를 털어놓았던 누군가의 개인사가 상대방에겐 없을 수도 있죠. ‘대체 무얼 얘기하라는 거지. 자신과 다른 삶이 있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나.’ 혼잣말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 있는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자신과 똑같은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신은 오직 자기 자신 한 사람뿐입니다. 타인도 세상에서 오직 그 한 사람뿐이듯 말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경험(데이터)을 바탕으로 타인을 판단하려 해선 안 됩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듯, 타인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줘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관계든 유지됩니다.
타인의 선을 밟지 않도록 합시다. 자신의 선을 지키면서 타인의 선도 밟지 않는 매너를 가지도록 합시다.
그땐 그랬군요. 세상의 법칙과 이치는 알았어도 사람들이 가진 진짜 모습을 파악하긴 쉽지 않았군요. 만남에서 배려와 존중은 중요합니다. 모든 인간은 똑같이 배려 받고 존중받고 싶어 합니다. 인간은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관계 형성에서 사랑, 배려, 존중, 신뢰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이 모든 걸 상실한 채 행동하는 사람을 과연 그저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원치 않는 관계는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오히려 더 좋습니다. 상대가 모르는 일이어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어도 기분이나 감정은 말해 주는 게 좋습니다. 핵심 없는 말만 계속할게 아니라, 맘을 아프게 할 게 아니라, 지난 과거사를 말할 게 아니라, 그 당시 자신의 감정이나 바라는 바를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습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것으로 늘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예의"입니다. 존중이 깃들여진 태도이지요. 사람을 빛나게 하고 움직이게 하지요.
처음에는 예의를 지키며 다가왔다가 슬며시 예의를 버려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 그 상대는 어떠했을까요.
아마 그 상대는 반응이 없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상대가 인격자일 경우는 물론 예의는 지켰겠지만 좋은 감정은 아니었을 겁니다. 예의없는 사람과는 무얼 하든 담담했을 거고요. 예의를 버린 사람의 맘을 알아주려 노력해도 애초에 없던 감정으로 얼마나 어찌 알 수 있었겠어요. 그리 되면 그나마 예의를 지키던 사람도 서서히 예의를 잃어버릴 수 있죠. 점점 더 예의가 사라지고 자신이 표현했던 모든 말들이 무색할 정도의 표정을 지으며 드디어 자신 본모습을 보여 주면서 서로 종지부를 찍습니다. 그냥 예의를 지키며 관계를 정리하면 되는데 인간은 상호 의존적입니다. 그만큼 나약합니다. 쉬이 함무라비 법전을 따를 만큼, 인간은 그만큼 나약합니다.
누구든 자기 입장이, 자신이 우선이지요. 특별한 감정 없이 시작한 인간관계여도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사람 있는가 하면, 처음과 달리 행동(예의)과 감정이 점점 옅어지는 사람도 있기에 흔들리는 상대를 견뎌줄 수 있는가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누군가와 교육관, 자녀 양육, 부부관계, 인간관계 등 그냥 다르기만 해도 괜찮을 텐데요. 사람의 본모습은 그냥 견디고 수용하기엔 심히 어렵습니다. 그 외에 몰랐던 새로운 모습도 추가되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귀찮다는 듯 그저 미안하다는 말을 일방적으로 주고받기도 합니다.
이리도, 무엇이 이리도 슬플까요.
인간관계, 사람이 이리도 슬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저는 외칩니다. 기대하며, 외칩니다.
”어쨌든, 저는 선하면서도 편한 듯 즐거운 사람이 좋습니다.”
슬픔_너부리n이상미

띠링.
부러 던져 놓은 핸드폰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릴 때 다시 한번 알림이 울렸다.
띠링.
침대 위에서 핸드폰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알림음의 주인은 너였다.
그럴 것 같아서 일부러 핸드폰을 찾는 척 시간을 끌고 있던 내모습이 한심해
난 또 침대 한켠에 걸터앉았다.
꽃망울이 터진 매화 사진 한 장과 함께 봄이 왔나 봐.라는 짧은 메시지
너는 마침내 봄을 걷고 있구나.
미묘하게 변해가던 메시지들.
함께 있는 사람들을 정확하게 지칭하던 이름들이 점점 친구들 동생들 사람들 이란 단어로 뭉뚱그려지고
짧아지고 텀이 길어지는 대신 물음표가 사라져 가는 메시지들을 보며
너의 겨울이 끝나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유난히 길었던 너의 이 겨울이 끝나길. 너에게 봄이 오길 기도한 건 나의 진심이었지만
막상 그대가 봄 속으로 들어선 지금
나는 여전히 겨울 눈길을 헤쳐가고 있다.
겉옷을 움켜쥐고 이 길을 걷다 보면 나도 언젠가는 봄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을까.
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따라 걷던 나의 겨울이 끝나고
너의 손을 잡고 함께 봄을 걷게 되길 바랬었다.
함께 갈 수 없다면 차라리 이 겨울이 계속되길.
너의 봄이 오길 바라면서도 오지 않길 바랬던 나의 욕심 사나웠던 겨울.
우리가 함께한 겨울을 뒤로하고 너는 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으니
거꾸로 흐르는 시간은 없는것처럼.
다시 지나올 수 없는 겨울이 끝난 것 처럼.
너는 안온한 곳으로 향해 갔으니 이제 나의 봄을 향해 갈 때.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핸드폰을 다시 침대 위에 던져 놓은 채 방을 나섰다.
봄을 걷는 이에게 겨울에서 온 답장은 필요하지 않을 테니.
#슬픔 #짝사랑 #어장 #파닥파닥
슬픔 _ 은비n장은비

<제목을 정할 수 없어서, 제목없음으로 남기는 슬픔>
여담과 사념으로 채울 이야기라, 달리 제목을 규정할 수가 없다. 뭐라고 해야할까. 이 슬픔에 가려진 우울감을 감당할 수 없을 때 음악을 듣는다. 듣다보면 어딘가 쾌쾌묵은듯한 묵직한 감정들이 수면위로 올라온다. 분명 친구를 만나서 맛있는걸 먹고이런저런 이야기를 할때는 괜찮았는데, 이 음악만 듣고 있다보면 마음이 벅차다. 먹먹해진다. 사회가 내맘대로 움직여주지 않음이, 관계가 내마음처럼 해결되지 않음이 왜그리도 사무치게 슬퍼지는 것일까. "작은 관계에도 몸사리는 사람들이 많대.", "요즘은 사랑을 말할 때도 괜한 에너지가 나가는게 싫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더라." 라던 친구의 말을 곱씹다보니, 진짜 사랑이란걸 이 나이에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생겨버렸다. 그래서 요즘 내 머리속 한가득 들어오고야 말았던 질문. 기브 앤 테이크 외에 남은게 없는 관계들이 슬퍼지고, 결혼이란 굴레를 살아내기 위한 일종의 매개체로 사랑이 취급 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다. 이해타산적인 관계를 그저 사랑이란 이름의 속박과 명목을 두고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팬트하우스에도 나오지 않는가. 서로의 이익을 취하기 위한 애절한 불륜 로맨스가 화두가 되고, 사람들이 열광한다. 단순히 재미를 위한 드라마 한편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미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상상인척 드라마화 되는 것이라면, 펜트하우스는 썩은 어른과, 어딘가 아이들을 지킬수 없을만큼 타락해버린 사회를 대변해주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실제 사회 역시 펜트하우스만큼이나 홍어 삭힌내가 진동하듯 사회의 흐름들은 전과 같지 않다고 느껴진다. 마음만 시큰해지고 알싸한 기분이 들어 코를 막고 귀를 막고 눈을 감아도 답답함만 가득하다. 목구멍까지 차오르지만 결코 소리낼 수 없는 외침은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잘 다독거려야 했다. 어디다 어떻게 소리치나요. 소리를 내면 해결이 될까요. 애당초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하긴 하는 겁니까. 단순하게 좋아졌고, 단순히 좋아졌으니 마음을 표현했는데, 표현할 떄마다 이해타산적 관계를 요구당하는 기분은 어딘가 부당했다. 어느쪽도 이익이 나지 않는 관계이니 시작도 하지 않길 바란다며 에너지를, 좋은 자원을, 낭비하지 말자는 말로 포장되는 행태들이 부지기수였고, 이내 포기에 포기를 하게 되버리곤 했다. 혹은 나는 이미 프레쉬하지 않은 나이인데, 넌 왜 프레쉬 하지 않냐며 대쪽같이 거절하는 사람들을 마주할떄, 이 삶을, 이 사회를 향해 분노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혹은 분별력만 있으면 어떻게든 살아볼 만 할 가치가 있는 삶일지를 생각하다가 결국 또 이 감정들을 차곡차곡 씹어 삼켰다. 썩어 문드러지더라도 밖으로 나오면 안되는 감정들을 켜켜이 내 안에 쌓아두는 것이 어른의 삶이라면, 어른은 자꾸 속으로 울어서 짓물이 나고, 과도한 습도에 곰팡이가 펴서, 그렇게 오늘도 썩고야 마는 삶이었다.
글을 이렇게 끝을 내버리면 너무 슬플 것 같은데, 더이상 어떻게 말을 이어야할지 모르겠으니, 그냥 이렇게 끝을 내련다.
슬픔 _ 복이끄미n최광복

두 손으로 얼굴을 더듬어 눈을 만져본다. 눈은 제자리에 있는데 눈부시던 세상은 보이지 않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히말라야에는 산소가 부족하다는데 이런 느낌일까. 가만히 숨 쉬는 것 조차 어렵다. 손끝 감각이 둔탁하다. 널따란 광장에 동상처럼 몸이 단단해졌다. 코끼리처럼 큰 쇠붙이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는다.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처럼 고요하다. 세상에 모든 시계를 꺼두었나 보다.
태어날 때부터 움직일 수 없었던 것처럼 가만히 있는다. "움직이다."라는 단어가 세상에서 사라진 것처럼. 그 자리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귀 기울여본다.
새들이 재잘거린다. 사운드 바에서 나오는 풍부한 음향이 귓가를 간지럽히듯 속삭인다. 마비가 풀리듯 온몸의 따스한 기운이 맴돈다. 향긋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고요
슬픔_첫문장n최현수

언젠가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내가 작정하고 불행해지려고 마음먹는다면,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역은 가능하다. 누군가 내 행복을 가로막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작정하고 행복해지려고 한다면? 그 ‘작정’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느냐에 달린 일이 아닐까? 정말 아무도 나를 막지 못하도록 하면 되는 게 아닌가.
뒷산에 김을 묻고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내게 가능한 것은 어디까지인지 시험해보고 싶다고. 손가락은 욱신거리지만, 날이 흐린데도 태양이 부담스러워 우산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내게서 피 냄새가 날 것 같았지만 공교롭게도 여기에는 그것을 맡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가방에 챙겨온 뿌리는 섬유유연제를 굳이 꺼낼 필요를 느끼지도 못하겠다. 아니, 지금은 그냥, 아무것도 안 느껴진다. 앞으로 내가 가야할 곳에 도달하려면 몇 명의 장례를 치러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것보다도, 점점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내 자신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래서야 행복이 아니라 불행을 향해 돌진하는 것 같잖아. 생각해라, 생각을. 나를 얼마나 더 혹사시키면 좋은 방안이 떠오를까. 이러다간 내가 무엇을 위해 노력해 온 것인지도 잊어버릴 것 같다.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전부가 되어버린달까. 그런 이들을 많이 봐왔다. 그들이 불행해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슬픔, 슬픔이란 뭘까. 그런 표정들이었지. 하지만 그 문장에서 슬픔을 지워버리고, 다른 감정을 대입한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적합한 말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도 차츰, 그들을 닮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 안달이 난 나는, 그 사실을 증명할 기회를 기다린다.
#증명 #혹은 #변명
| 분노/노여움_anger (0) | 2021.05.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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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쓰는 밤 시즌 2021-1 소개 (0) | 2021.05.28 |